일단, 전두환의 광주지역 고립작전이 훌륭한 성과를 거둔 이유가 크지요...
그러니깐 당시에 충분한 문제제기조차 되질 않았죠...
사건으로부터 24년이나 지난 서기2004년도, 지금까지도 5.18을 지역적 차별에 의한 설움의 폭발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가 가실겁니다...
즉, 당시에는 더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아시다시피, 5.18당시에는 타지역에서 5.18이 당시에 수없이 펼쳐지던 반독재 시위의 하나 정도로만 치부되었었으니, 특별히 거기에 관심을 가질 사람들이 드물었겠죠...
아무리 지식인이라고 하더라도, 당시 광주상황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지식인들의 참여는 굉장히 부족할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지 광주.전남쪽의 지식인들만이 사건의 본질을 알리려고, 유럽과 미국등의 외신과, 개인적인 채널을 통해서 노력했었습니다...
결국,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은 서방세계의 지식인들보다, 광주사태에 대한 더 부족한 지식과 비판을 보였습니다.... 부끄러운 과거이지요....
결국... 사건 당시의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아쉬운대로, 당시 광주지역 대학생들을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어찌보면 대학생도 엄연한 이땅의 지식인들이니까요...
위엣분들이 충분히 설명을 해주셨는데, 사건의 발단을 보면은....
전국적으로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반독재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고 있었고,
광주지역도 마찬가지로, 전남대 학생들에 의한 시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공권력의 과도한 제재와 탄압을 받았고, 시위세력은 일부 젊은 시민계층과 고등학생계층에까지 퍼져나갔습니다...(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고등학생들이라도, 고등교육을 받은 계층에 속했답니다... 대구지역 4.19의 중심세력이 고등학생이었듯이...)
하지만, 시위대에 대한 신군부의 탄압과정에서, 많은 끔찍한 만행들이 벌어졌습니다...
여자 대학생,고등학생들의 젖가슴을 칼로 도려낸다든지, 초등학교 교사였던 남편의 퇴근을 마중나왔던... 임신 8개월의 임산부의 배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와 산모를 동시에 죽였다든지.... 또, 태아의 성별 알아맞추기 내기를 해서, 확인차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든지.... 시위대가 아니었던 일반시민들까지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해버린 것이었죠....
결국, 시민들의 분노는 공감대를 타고 확산이 되었고....
그 분노와 참여를 전남대생들(아까 말했다시피, 그나마 몇 안되는 지식인...)이 조직화, 세력화 시켜서 이끌었던 것입니다...
결국 5.18은 처음 학생들의 반독재 시위가, 시민들의 "혁명"으로 발전을 했던 것입니다...
시민 혁명군은, 경찰서나 예비군 무기고등을 습격해서 군용무기를 탈취, 화력을 보강했고,
그 화력으로, 광주중심가에 있는 전남도청을 점령... 혁명군의 본기지로 삼고 저항을 해나갔습니다....
그 다음은... 모든 사람들이 알다시피... 제 20기계화 보병사단(결전부대)의 '전병력'과, 이미 투입되어있던 특수공수부대(특수전사령부), 그외... 25사단, 16사단 등등의 일부 병력과 몇몇 전방부대(1사단, 9사단 등등....)의 비전투 지원 등등의 종합 군사작전에 의해 혁명군이 쉽게 평정되었습니다....
당시 한미연합사령관이었던 위컴장군의 훗날 인터뷰를 통해서.... 미군의 신군부 지원방침결정과, 민주화세력 탄압 및 민간인 학살에 대한 묵인도 큰 역할을 했음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구요....
위컴장군이 5.18관련해서 미국의회 및 정부에 보고를 할때 이렇게 말했답니다...
"지금의 사태가 진정이 되면, 어차피 한국민들은 언제그랬냐는듯이 전두환장군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일 것이고, 지금 대세는 이미 기울었으니만큼, 미국이 나서서 간섭할 이유가 없어보인다... .... 전두환장군은 성격이 모나고 다혈질인 것처럼 보이지만... 친미적 성향이 강하고, 순진한 측면이 있어서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것이다..."
이게 당시 미국이 전두환의 신군부를 지원했던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여담으로..... 5.16쿠데타를 이끌었던 친일파 출신의 오까모또 미노루, 12.12쿠데타를 이끌었던 전두환, 노태우가 모두 2 Star... 즉, 소장이었답니다... 한마디로... 짬밥도 안되는 것들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삼켜버렸으니... 대한민국 군대는 정말 족보도 없는 개판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제가 생각했을때, 5.18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대한민국도 시민들의 피로 민주주의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프랑스시민들이 공화국에 대단한 애착을 보이고 있는데요...
그것은 자기네 선조들이 프랑스시민혁명이라는....
시민들의 "생명과 피"로써, 지금의 민주주의와 공화정을 얻었다는 강한 자부심입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독립전쟁이 있구요... 시민주도는 아니지만, 영국의 명예혁명도 비슷합니다...
우리에게도 5.18이라는 역사가 있으니.... 대한민국 시민으로써의 긍지를 느낄수 있겠지요... 실제로 5.18은 외국에서 프랑스시민혁명과 함께, 근대사회 및 현대사회의 주요한 시민혁명의 하나로 연구가 되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일이지요...
제가 감정이 복받쳐서 님이 질문하신 요지를 많이 벗어났는데....
끝으로 지식인들의 활동과 항쟁의 관계를 현재진행형의 측면에서 2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즉, 지식인들이 해야할 의무라고 생각할수 있겠는데요....
첫째는.... 5.18을 "광주민주화운동"이 아닌 "5.18 혁명"으로 공식명칭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18은 독재권력에 맞선 우리 선대 시민들의, 후세들에게 물려줄수 있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4.19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민주시민으로써의 긍지를 5.18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이제 1980년 5.18 시민혁명의 공식적인 "승리"를 선언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5.18사건 당시.... 우리가 비록 "전투"에서는 진게 사실이지만...
그 파장이나 영향력을 통해서... 지금의 결과를 본다면....
우리는 "전쟁"에서는 승리를 한것입니다....
지금도 많이 부족하지만.... 그나마 민주주의가 많이 뿌리내리지 않았습니까...
수구, 기득권세력의 대통령탄핵도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서 물리쳤습니다...
군사정권은 물러난지 이제 10년도 더 지났습니다... 스스로 물러난게 아니라, 설곳이 없어 쫓겨난 것이지요... 저는 이게 바로 "혁명의 승리"에 의한 전리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 누가 일으켰느냐?
그건 시민이죠.. 물론 처음에야 학생들이 주체가 되었지만.. 후에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확대되었습니다..
2. 왜 일어났느냐?
박정희 전대통령의 유신독재 체제가 그의 사망으로 인하여 붕괴되자 민주화 운동이 발빠르게 전개 되었는데요..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 세력에 의해 이를 저지 하기 위한 군부의 투입이 발단이 되었다고 할수 있겠네요..
그로 인해 80년대 초부터 발생되던 민주화의 요구와 군부의 마찰이 더 심각하게 발전되어서 5.17일 전국에 비상계엄이 공표되면서 전국에 주요 대학들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되었죠.. 5.18일 광주지역의 대학생들이 이들 공수부대에 의해 무참히 사상을 당했는데요..
이를 발단으로 대학생들의 시위, 이를 저지하기위해 공수부대원들은 무차별 가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차별 구타를 했었구요.. 그로 인해 시민들의 분노가 더 커지게 되었죠..
이렇게 더 커진 광주사태는 결국 유혈사태로 까지 심각하게 커지게 되었답니다..
이런 상황이 5.27일까지 계속되었구요.. 시민을 향한 발포까지도 감행을 하게 되었죠.. 무차별 학살이라고 말할정도로.... 그로인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었던 참극이라고 할수 있답니다..
3. 피해..
사망자 : 154명
행방불명자 : 70명
부상자 : 3,193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 1,589명
총 5,006명 중 중복인원 694명 제외
총계 : 4,312명
4. 누가?
주체는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세력이라고 할수있죠.. 즉, 전두환 정권..
그리고 1996년 이들은 국민들의 심판을 받게 되었답니다..
이건 짧은 글이고
자세히 말씀들이자면
길 것 입니다. 아휴 팔아 ㅠ.ㅠ;;
일제 36년 끝에 얻은 8.15광복, 온 국민이 기뻐했겠지만 그것은 진정한 광복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국토가 남과 북으로 갈라졌으며, 남한의 경우는 그나마도 친일파들의 숙청이 안 되서
일제시대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독립투사가 아닌 미군정의 보호 아래 친일파들이
이전의 군력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죠...
아니 오히려 우두머리였던 일본인들이 돌아갔으니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곧 지유당의 이승만정권과 손을 잡게 되었는데,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를 비호하고 친일파들은 이승만에게 충성하면서 자유당 독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시민과 학생들의 독재에 대한 불만은 점차 높아져갔으며,
그 와중에 1960년 3월에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이라는 학생이 눈에 채루탄을 박은 채 떠올랐습니다.
경찰이 시위 중에 죽은 학생을 수장했던 것이지요.
이 사건으로 인하여 들끓은 민중은 마침내 4.19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이승만 정권을 몰아냅니다.
하지만 4.19의 기쁨도 잠시였으니,
자유당시절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국민들이 흘린 피의 댓가로 정권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국정을 펴나가기는 커녕 신당과 구당으로 나뉘어 서로의 이익을 차리기에 급급했고,
결국 이듬해인 1961년에 박정희, 김종필 등에 의한 5.16군사 구테타가 일어나게 됩니다.
총칼을 앞세워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후 18년 동안 참으로 지독한 독재를 자행하다가
결국 1979년 10월 26일에 김재규에 의해서 저격당합니다.
박정희가 죽자 그해 12월 12일에 전두환, 노태우 등이 다시 탱크를 몰고 쿠테타를 일으키고 계엄을 선포합니다.
이듬해인 1980년 5월 17일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계엄이 확대됨과 동시에
당시 민주투사 였던 김대중 전대통령을 간첩이라는 누명으로 구속됩니다.
결국 5월 18일 전남대학생들을 비롯한 광주지역의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다가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게 되며, 이에 분노한 일반 시민들까지 합세함으로써 마침내 위대한 5.18민중항쟁은 그 슬픈 서막을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5.18기념재단 홈페이지(http://www.518.org/) 에서 퍼온 당시의 상황일지입니다.
5월 17일 (토요일, 맑음)
·21시 40분 : 비상국무회의, 비상계엄 전국확대 의결
·23시 00분 :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검속
·24시 00분 : 비상계엄 전국확대, 광주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및 학생 연행
5월 18일 (일요일, 맑음)
·9시 40분 :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
·10시 00분 : 학생들이 "계엄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
·10시 15분 :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10시 20분 : "금남로로 가자"는 구호와 함께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
·15시 40분 : 유동 3거리에 공수부대가 등장하면서 진압작전 감행
·19시 02분 : 계엄사령부, 광주지방 통행금지시간이 저녁 9시로 앞당겨졌다고 발표
5월 19일 (월요일, 오후부터 비)
·3시 00분 : 증파된 11여단 병력, 광주역 도착
·9시 30분 :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10시 00분 :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4시 40분 : 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무리한 진압작전 전개
·15시 00분 :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회의를 갖고 시위 진압을 완화하도록 건의
·16시 30분 :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생 김영찬이 계엄군의 총에의해 부상
·20시 00분 : 수만명의 시민들 "전두환 타도" 외침.
5월 20일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8시 00분 : 고등학교 휴교조치
·10시 20분 : 카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힌 채 심하게 구타당함. 공수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 계속
·18시 40분 : 금남로에서 200여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이자 시위대
분위기 고조
·20시 10분 :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금남로, 충장로, 노동청 방면에서 공수부대, 경찰과 대치
·21시 05분 : 노동청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
·21시 50분 : 광주MBC건물 방화
·23시 00분 :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 사망
5월 21일 (수요일, 맑음)
·0시 35분 :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2시 18분 : 시외전화 두절
·4시 00분 :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 남로에 등장
·4시 30분 : 광주KBS건물 방화
·8시 00분 :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20사단 병력과 충돌
·10시 15분 : 실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 맨 앞으로 교체
·10시 19분 : 광주세무서건물 전소
·11시 10분 : 대형헬기, 도청광장에 도착
·12시 59분 :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13시 00분 :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 사격 시작
·13시 20분 :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14시 15분 : 도지사, 경찰헬기에서 시위해산 종용하는 설득 방송
·14시 35분 :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
·14시 40분 :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15시 48분 : 공수부대원들이 주요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
·16시 00분 : 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16시 43분 :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LMG) 2대 설치
·17시 30분 :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
5월 22일 (목요일, 맑음)
·9시 00분 :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10시 30분 : 군용헬기 공중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11시 25분 :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12시 00분 :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13시 30분 :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 방문, 7개항의 수습안 전달
·15시 08분 : 서울서 대학생 5백여명 광주 도착, 환영식 거행
·15시 58분 :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17시 18분 :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결과 보고
·17시 40분 :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21시 30분 : 박충훈 신임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 맑고 한때 흐림)
·8시 00분 :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10시 00분 : 시민 5만여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
·10시 15분 :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 시작
·11시 45분 : 도청과 광장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13시 00분 :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15시 00분 :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전단이 시내전역에 살포
·19시 40분 :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 오후에 비)
·13시 20분 : 공수부대,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14시 20분 :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교사부대간의 오인 총격전 발생
·14시 50분 :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비)
·11시 00분 :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와 광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원 전달
·15시 00분 :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21시 10분 :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발생 예방과 식량공급 청소문제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아침 한때 비)
·5시 20분 :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8시 00분 :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 감행
·10시 00분 :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4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15시 00분 :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상황 브리핑
·19시 10분 :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조치 시킴.
·24시 00분 :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5월 27일 (화요일, 맑음)
·3시 00분 :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4시 00분 :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4시 10분 :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들에게 사격
·5시 10분 :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전역 장악하고 진압작전 종료
·6시 00분 :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 방송
·7시 00분 :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8시 50분 : 시내전화 통화 재개
당시 광주의 병원들은 그야말로 전쟁터와 다름 없이 부상자들로 넘쳐났으며,
다친 사람들을 위해서 어린 여학생들까지 헌혈을 하겠다고 줄을 늘어섰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그 10일 동안 단 한 건의 범죄 신고도 접수되지 않았다고 하니,
당시의 광주시민들에게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저 역시 광주를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역사적 자료들을 덥할 때마다 온몸에서 전율이 느껴지고 눈물이 나려 합니다.
특히 망월동 묘역을 참배했을 때,
묘비에 실린 너무나도 옛된 고등학생의 사진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군요.
끝으로 80년 광주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고싶으시다면
봄날(저자 임철우)이라는 소설을 읽어보세요.
당시 전남대 1학년이었던 작가가 넋이 되어 떠난 이들에 대한 미안함
혹은 살아남은 자로써의 죄책감으로 적어 나간 소설인데,
2000년 광주민중항재 20주년에 연극으로 각색되어 공연되었을 정도로 광주문학의 최고로 꼽힙니다.
아이고 팔이 부서질것 같다 ㅠ.ㅠ;;
5.18민중항쟁.. 오랫동안 민주화를 갈망해온 우리 민족의 돌이킬수 없는 비극이자 참사이다.
5.18이 있기까지 과정을 간추려서 그려본다. 이승만정권부터 그칠줄 모르는 독재청지.. 12년간 이승만은 정권을 잡았지만 국민들의 민주화 물결에 부딛치고 곧 4.19의거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이에 다급한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하였고 이어 윤보선의 제 2공화국이 탄생했지만 정말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정부의 부정부패, 2공화국의 무능함.. 이 모든게 5.16 군사쿠데타를 일이키게 했다고 볼수 있다.
박정희(당시계급 소장)는 1961. 5. 16 오후 3시를 기해 군사들을 동원하여 국가를 위기로부터 구하고 부정부패를 추방한다는 명분하에 쿠데타를 일이킨다.
이어 18년간의 긴 유신정권이 시작된다.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를 위해 제 7차 헌법개정을 통해 유신정권을 자리매김하게 된다 술자리에서 마음대로 말도 못하고 그저 소리죽여 살아야 했던 시대.. 영문도 모른체 끌려가서 옥사를 치루는 사람들..
국민들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 유신정권에 맞서 부마항쟁이라는 대민족 민주화 물결을 일으킨다
이는 단순한 유신체제의 저항운동을 넘어 대한민국 최초의 신자유주의의 저항운동이라고 역사가들은 해석한다.
국민들의 민주화 갈망은 더욱 간절했다. 이에 결말은 박정희의 피살로 이어진다. 부마항쟁에 연이은 박정희의 피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식당 만찬에서 1979. 10. 26 박정희를 시해한다. (김재규는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킬때 김종필과 함께 앞장 섰던 인물이다.) 이에 게엄령이 선포되고 익일 최규화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게된다.
이에 전두환은 몹시 분노하였다. 평소 아버지처럼 모시던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제일먼저 김재규를 족치기 시작한다.
박정희 시해사건으로 인해 국민들은 오랫동안 갈망해온 민주화를 실현할수 있겠다며 모두 기대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12.12 사태가 일어난다. 당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었으며 12.12 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중앙정보부장까지 겸직함으로써 만반의 준비를 갖춘것이다.
12.12 사태가 끝나고 한참이 지난후.. 게엄령은 해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1980년 5월 17일 게엄령이 확대되면서 김대중을 구속하고 평소 눈에 가시처럼 두었던 호남지역을 무차별하게 밀기 시작한다.
이후 전두환이 집권하게 되고 눈물어린 5.18의 비극이 채 가시지도 않은 87년 6월 다시한번 6월 항쟁이라는 거센 민주화 물결이 일어난다.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왔으며 그때마다 국민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국민들이 깨어있어야 나라가 바로선다. 오늘날이 있기까지 우리는 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날을 부르짖으며 울분을 토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최루탄 앞에서 목숨을 잃었던가..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 세력에 의해 이를 저지 하기 위한 군부의 투입이 발단이 되었다
그로 인해 80년대 초부터 발생되던 민주화의 요구와 군부의 마찰이 더 심각하게 발전되어서 5.17일 비상계엄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전국에 주요 대학들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된다..
신군부세력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를 발표하고 민주인사들을 체포 투옥하기 시작하자 광주에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과 이에 반발하는 학생 ·시민 연대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
5.18일 광주지역의 대학생들이 이들 공수부대에 의해 무참히 사상을 당한다.
이를 시작으로 하여 대학생들의 시위들은 계속 되었고, 이를 저지하기위해 공수부대원들은 무차별한 가격을 감행하게 된다. 인권유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인간을 마치 짐승취급 하듯이 다룬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차별 구타를 했고 연행을 할 때는 옷을 발까벗기까지 했다.
국가안보를 위해 써야할 탱크가 광주시내에 들어오니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시민들이 무슨 힘이 있으랴.. 짓밟히고 또 짓밟히고.. 시민들의 분노는 점점 커지게 되고 마침내 거센 물결이 일어난다.
이렇게 더 커진 광주사태는 결국 유혈사태로 까지 심각하게 커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5.27일까지 계속되자 공수부대측은.. 시민을 향한 발포까지도 감행을 하게 된다.
이른 바 무차별 학살... 시민들은 예비군 무기고, 경찰서 에서 총을 구해 반항하지만 외부로 연락이 고립된 광주시내에 공수특전단의 무차별한 발포로 여러사람들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한다.
5월 18일부터 시작된 시민항쟁은 시민자치와 민주주의공동체 구현 등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27일 새벽 2만 5,000명에 달하는 군을 투입한 무력진압에 정부공식 발표 사망 191명, 부상자 852명을 내고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1970년대의 지식인 중심의 운동에서 민중운동으로의 변화를 가져왔고, 국민들의 대미인식 변화와 함께 사회운동의 목표로 민족해방 ·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기점이 되었다.
발발 당시에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되었다가 1988년 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하였고, 1988년 11월 사건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를 개최했다.
1997년부터 헌법으로 지정한 민중항쟁으로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사실 이글 퍼온건데 문제제기되어서 문제제기하신 분의 글을 덧붙였습니다. 참고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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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2공화국이 무능했다고 했는데 이는 쿠테타로 정권을 빼앗은 박정희 정권이 정통성을 얻기 위해 2공화국을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으로 몰았을 뿐, 2공화국 자체가 무능한 정권은 아니었습니다. 이 때는 4.19 이후 이승만정권하에서 움추렸던 국민들의 권리가 신장되고 국민들의 요구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시대 상황이었음을 인식해야 하며, 박정희씨의 치적으로 내세워지는 경제개발도 이미 2공화국에서 계획이 세워졌던 것으로 쿠테타가 없었으면 우리 나라는 훨씬 좋은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전대미문의 독재였음을 새로운 세대들이 알아야 합니다. 할 말 다하고 사는 요즘의 신세대들은 할 말을 할 수 없었던 시절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이 누려야 할 모든 기본적인 자유마저도 통제되었던 시절이 바로 박정희가 집권하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국민은 그저 그의 노예였을 뿐...... 우리가 욕하고 있는 김일성이나 김정일과 똑같은 사람이 바로 박정희였습니다. 그런 박정희가 훌륭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기가 찰 뿐입니다. 새로운 대통령이 박정희식으로 정치하면 박수를 칠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셋째는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 원인입니다. 5.18은 청문회에서도 일부 드러났듯이 처음부터 계획하에 만들어진 항쟁입니다. 5.18이 있기 전날 이미 전남대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공부하는 학생들을 구타하여 충동질했고, 초기단계부터 아무 죄없는 시민(임산부, 어린이 등)들을 죽이고 구타하고 끌어가는 등 시민들의 분노를 촉발하기 위한 일련의 계획들이 진행되었으며, 시민봉기가 일어나자 무기고와 광주시내를 비워주고 외곽으로 물러나는 등 시민들의 항쟁을 유발시키고 폭도로 몰아부치는 치밀한 계획이 존재했습니다.
넷째, 광주정신입니다. 5.18항쟁 기간 동안 광주에서는 범죄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민주질서가 확립된 상태가 줄곧 유지되었습니다. 최근 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 국민이 보여준 약탈과 방화는 80년 광주의 모습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음을 우리 국민은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다섯째, 5.18희생자의 수는 우리 국내에서 발표된 것과는 달리 외국에서는 2천여명의 사상자로 발표가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진압부대였던 공수부대원들의 용기있는 고백들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여섯째, 5.18민주항쟁은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 연출하고, 여기에 굴하지 않고 총칼과 맞서싸운 용기있는 시민의식의 발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부 발표대로라도 200명에 가까운 생명의 희생을 담보로 정권을 쥔 전두환은 인간의 자격이 없음을 밝히며, 이러한 일련의 비열한 기도도 박정희의 쿠테타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역사는 절대 진실의 기록이 아닙니다. 역사는 승자의 논리로 기술되어지는 것입니다. 싸움에서 이긴 측이 정의가 되는 것이 역사입니다. 역사를 바로 보는 눈이 절실합니다.
성심껏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원인 , 결과 이런것들은 다 아실거라 생각하구요 중요한 전개 부분만 알려드릴게요.
광주 시민들은 정말 민주적인 시위를 펼칩니다. 물론 시위는 서울에서 더욱 더 많이
일어났지만 광주에서 피가 많이 있엇던 이유는 전두환이 광주라는 특정 지역을
타겟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거의 시범타로 때렸단 소리죠.
군인들이 아무리 때리고 총칼로 진압해도 정말 시민들은 끝도 없이 몰려나옵니다.
그것두 정말 민주적으로. 피켓 들고 그냥 걷고.. 걸으면서 노래 부르고.
그런데 자꾸 군인들이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하니까 시민들도 시민군을
조직합니다. 그것두 6.25때 쓰던 구식총으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광주를 지키기 위해,
민주화를 위해! 전남도청을 놓고 그 앞에서 일촉즉발의 대립을 하고 있떤 시민과
군인들... 그런데 갑자기 애국가가 울리면서 무차별 발포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500명의 사상자가 나옵니다.애국가가 발포하라는 신호였죠.
하지만 시민들은 정말정말 많이 끝도 없이 나옵니다. 군인들도 이쯤되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죠 아무리 우리나라 최고의 부대라도.
그래서 군인들은 결국 광주 외곽 지역으로 후퇴하기에 이릅니다. 시민들은
도청을 장악하고 조기와 태극기를 걸죠. 그렇게 시민 자치가 시작됩니다.
그런상태에서도 시위를 하죠 정말 민주적으로.. 모여서 궐기대회도 하고..
이런상태에서 시민들은 어떻게든 광주 외 다른 지역으로 이 소식을 알리려 하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군인들은 재정비하고 더욱 더 많은
군인들을 이끌고 몰려 옵니다.시민들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죠.
탱크 12대 장갑차 9대에 헬기까지.. 헬기에서 헌혈하러 가던 여학생도 죽이고..
공중전화부스 안에 있던 사람도 죽이고.. 무차별 만행이었습니다.
그 때! 일부 대학 교수와 몇몇 분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탱크 앞으로 천천히 걸어갑니다
이걸 '죽음의 행진' 이라고 하는데요 걸어가서 이제 광주 사람을 그만 죽이라며 얘기를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죠.
결국 도청은 다시 빼앗기게 되고 숨막히던 10일간의 항쟁도 끝을 맺게 되죠.
하지만 정말 중요했던건 시민들의 민주 의식입니다. 시민군들에게 총도 지급되고
이제 은행,금은방 같은데로 가면 그런거 다 훔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시민도
시민 군들도 그런 일을 하지 않죠.. 시민 의식이 참 높죠..;;
답변이 너무 허접한듯..ㅡㅡ; 그냥 읽어 주세용~
광주 민주화 운동
다시 스러진 민주화의 꿈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후 헌법 제 48조 규정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최 권한대행은 27일 오전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는 동시에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을 임명했다.
이어 최 권한대행은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제 1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최 대통령은 '우리는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의사가 전혀 없는 정부'라는 말로 국민들의 의구심을 풀려 했다. 야당인 신민당은 정부가 과도기간을 연장하는 등 불만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으나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국민들 역시 유신체제라는 억압에서 막 벗어나려는 순간에 있어 정부의 조치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12월 12일 저녁 10·26 사건 수사를 맡았던 보안 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9사단장 노태우 소장 등 하나회 출신의 정치군인들과 (황영시, 유학성, 박준병, 박희도, 장세동, 김진영, 최세창, 정호용, 허삼수, 이희성, 김복동.....) 함께 일련의 군사 행동을 취하였다. 全 사령관은 박대통령 암살 사건에 관련 혐의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계엄 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을 강제 연행하는 하극상의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게다가 정 총장을 연행하면서 총격전까지 벌였다.
한편 전 사령관의 연행 재가 요청에 최대통령은 정 총장 연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노재현 국방장관도 정 총장을 석방하고 각자 부대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전 보안 사령관은 이를 거부하고 군을 동원해 무력으로 중앙청, 국방부, 육군 본부 등 국군 중추부를 차례로 장악하고, 각 방송국, 신문사, 통신사를 그들의 통제하에 두었다. ( 12. 12 쿠데타 )
결국 이 사건으로 전두환 보안 사령관 등 일부 군인들(신군부)의 위법적인 행동에 반대했던 많은 군 장성들이 체포되고 군에서 쫓겨났다. (신군부는 정승화를 비롯, 그의 추종세력인 3군 사령관 이건영, 특전 사령관 정병주,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등을 80년 1월 20일자로 모두 강제 예편시키고 정승화에게는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전두환 사령관은 자신의 육사 동기생 및 가까운 친구들을 요직에 앉혔다. 9사단장 노태우 소장은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됐다. 또 쿠데타 주체 세력들은 특전사령관과 3군 사령관 등 핵심 부대의 책임자가 됐다.
美정부와 서울의 미대사관측은 전두환 사령관의 '권력 찬탈'(Power grab; 당시 글라이스틴대사가 사석에서 사용한 표현)을 원상태로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런 노력이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의 측근들에게 "우리는 12월 12일 일어난 사건을 역전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고 명백히 밝혔다. 그 대신 미국은 전사령관에게 정치에 개입하거나 정치권력을 차지하려 들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충고를 간단히 무시하고 곧바로 정치 개입과 정치 권력 장악에 나서게 된다.
12·12쿠데타는 약 20년에 걸친 박정희 군사 독재가 끝난 후 국민들이 열망하던 민선·민주 정부의 부활을 가로막았다. 그 후 몇 달에 걸쳐 군부가 다시 집권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무력을 동원한 한 무리의 군인들에 의해 국가 권력이 또다시 찬탈되고 있음을 느꼈다. 1970년대는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70년대에 바침
신해철 작사·작곡
하늘이 그리도 어두웠었기에 더 절실했던 낭만
지금 와선 촌스럽다 해도 그땐 모든 게 그랬지.
그때를 기억하는지 그 시절 70년대를.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와 가위를 든 경찰들
지금 와선 이상하다 해도 그땐 모든 게 그랬지.
그때를 기억하는지 그 시절 70년대를.
* 무엇이 옳았었고 (무엇이) 틀렸었는지
이제는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을까
모두 지난 후에는 (누구나) 말하긴 쉽지만
그때는 (그때는) 그렇게 쉽지는 않았지.
한발의 총성으로 그가 사라져간 그날 이후로
70년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지.
수많은 사연과 할 말을 남긴 채.
남겨진 사람들은 수만의 가슴 마다에 하나씩 꿈을 꾸었지.
숨겨왔던 오랜 꿈을.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가.
장군들의 긴박한 현장 육성
(보안사령부 비밀 녹음 테이프 ; 이건영 3군 사령관과 장태완 수도경비 사령관의 전화 통화 ; 12일 밤 10시 16분)
.........
.........
이 : 응
장 ; 그러니까 헌병감이 턱 들어오더니 총장님이 피습당한 것 같다.....
이 : 총장이 뭐라고?
장 ; 총장님이 피습당한 것 같다.... 이렇게 탁 돼 가지고 그래 제가 확 나가면서 총장님 공관에 전화를 딱 걸으니까 공관의 경호 대위 김대위가 탁 나오더니 [사령관님, 지금 빨리 앰뷸런스를 좀 보내주고..... 총장님이 피습 당했습니다.] 이렇게 아주 경황없이 이야기를 해요. 알았다, 그러면서 제가 전화를 딱 끊고 바로 거기서 제가 차를 몰고 부대에 들어오면서 바로 부대 출동태세를 갖춰놓고 APC하고 병력을 총장 공관으로 우선 급파를 시켰지 요. 그러고 앰뷸런스를 보내고 동시에 총장님을 빨리 구출하기를 이렇게 하고 그러고 지금 제가 여기와서 대략 상황을 보니....파악이 안되는데 우선 총장님 문제만 생각해서 갔더니 거기 가서 보니 해병대 애들하고 우리 헌병들이 들어가 있는데 이놈들이 우리 헌병 들어간 놈이 총장님을 피습한 건지 원래부터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해병대가 총장을 피습했는지 그건 모르 겠는데..... 아무튼 해병대가 우리 헌병을 그 안에 한 50명 있는 것을 포위해 가지고 마이크로 버스에서 안 내보내고 있어요.
이 ; 우리 헌병이?
장 ; 못 나오고 있어요.
이 ; 해병 헌병 때문에.
장 ; 해병 헌병이요, 우리 0 0 니까.
이 ; 응
장 ; 육군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났기 때문에 자기네는 무조건 안 내보낸다 이거죠. 그래 마침 해군 헌병감이 오고 이러는데.... 30단에 유학성 장군이 와 있다.... 이래서 나를 자꾸 찾는다 이래서 예감이 이상해서 말입니다. 지가 빨리 상황실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와 가지고 30단에 유학성 장군이 있다고 해서 전화를 바꾸니까 이미 오래된 것처럼... [왜 유장군님 남의 부대에 와서 왜 이럽니까?] 제가 예감이 이상해서 물으니까 [에이 장 장군 거 알면서 왜 그래 이리와....] [이리 오기는 어딜 와 . 당신이 왜 그래요. 왜 남의 (부대에) 한밤중에 와서 무슨 지랄하고 있어. 쏴 죽인다.] 이렇게 했더니 황영시 장군한테 전화를 바꿔요. 황영시 장군이 있다가 [장태완이 너 왜 그래. 알 만한 사람이 나하고 다 통할 수 있는 처지인데 왜 그래. 이리 와 ] [ 아니 왜 이라십니까. 왜 그 우리 좋은 총장님을 어쩌자고 납치해 가지고 왜 이라요. 정말 그러면 내 죽여] 했더니 [차규헌이도 와 있고
다 와 있는데 마 이리와....] [ 무슨 .... 혼자 다 해먹어. 임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해놓고 바로 출동준비를 갖추고 있는 중인데 말입니다.
이 : 응, 그러면 말이야.
장 ; 보니깐 조그만 이놈들이 장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화를 올리는 것은 총장님은 납치돼 가지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그라는데요. 참모차장하고 모두 저짝에서 전화가 오기를 [어떻게 되느냐] [어떻게 되긴 나는 딴 것 없다. 쳐들어간다. 30단이고 다 쏴 죽인다] 했더니.....
(중략)
이 : 그럼 말이야, 30단이 장 장군 명령권 내에 있는 거 아니야?
장 ; 그런데 거기에는 제가 자극을 안하는기요. 거기에 몽땅 모여 있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새끼들 거기 모여 있으면 뭐합니까. 제가 단장한테 전화를 걸어가지고 이리 오너라 하든지 지시하든지.... 처음에는 단장보고 금마들(그 놈들) 당장 쏴 죽이라 했거든요. 그런데 단장이 모두 그놈아들한테 누질려 (눌려) 있는 것 같아요
이 ; 그런데 현재는 말야. 다른 30이나 33이나 부대동원에 대해서는 각각 지휘관들한테 내 명령 없이 출동하지 말라고 지시는 해놔 있어요.
장 ; 지가 알아서 해 놔 있어요.
이 : 그래서 여기선 부대는 하나도 동원 안하는데 쌍방이 충돌이 없이 잘 돼야지, 그렇지 않으면 굉장한 불상사가 생겨.
장 ; 그까짓 거 충돌이고 뭐고 몇 놈 죽어도...
이 : 글쎄 잘못된 놈은 죽어도 좋은데.
장 : 하여튼 내부에선 제가 죽든 살든 할 테니까요. 사령관님은 바깥을 좀 해 주십시오.
이 : 그렇게 해요..... 이거 뭐 좀 불순한 장난이 있는 것 같애.
장 ; 예, 완전히 장난이라요. 전두환이하고 이놈아들이 모두 작당(?)해 가지고 장난인 것 같애요.
이 ; 응
장 : 그리고 여기도 보니까 단장들이 몇 놈들이 자취를 감추고 없는데요. 그놈 아들한테 전부 사전에 공작을 해서 한 모양인데...
(중략)
이 ; 알겠어. 이게 뭐 굉장히 불순한 장난이 있어 큰일이야.
장 : 안에선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이 ; 이랬다가 북괴한테 큰일 나요.
장 ; 사령관님은 바깥에서 잘 해 주십시오.
이 ; 알겠어요
장 ; 저는 안에서... 이놈의 새끼들 다 죽이든지 해버릴 테니....
이 ; 하여튼 빨리 수습을 좀 하도록 해. 이거 굉장히 불행한 사태야.
장 : 알겠습니다.
이 : OK, 전화줘 고마워요.
좌절된 '서울의 봄'
1980년 봄이 왔다. 10·26 사태로 비상 계엄이 선포되고 12·12 쿠데타 등 불안정한 정국의 추이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국민들은 오랜 유신 체제의 망령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주 사회에 대한 희망을 키워 나갔다.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처에서 민주화의 물결은 봇물 터지듯이 솟구쳤다. ( '서울의 봄' ) 4.19직후처럼 민주회복의 물결이 도도하게 흘러 군사독재의 모든 잔재를 씻어내는 듯 했다. 사람들은 이제는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김영삼·김대중의 행보에 신경을 썼다. 두 사람은 단결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부는 새로운 민주 헌법의 제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이에 학생들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학생들은 이제까지 정부 태도를 볼 때, "최규하 정부는 유신 잔당으로 민주화 의지가 없다"고 단정지었다. 신중하게 학원에서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학생들은 5월이 되면서 거리로 나왔다. 14일과 15일 서울의 대학생들은 계엄령 하인데도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가졌다.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에 놀란 정부는 서둘러 학생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신현확 총리는 15일 담화문을 발표해 "국회와 협의해 모든 정치 일정을 최대한 앞당기겠다"며 학생들에게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중동을 방문중이었던 최 대통령도 일정을 하루 앞 당겨 16일 밤 귀국하려 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일단 15일의 시위를 중지하고 정부의 태도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최대통령이 귀국했을 때 상황은 국민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고, 국민들은 다시 한번 깊은 좌절을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일주일만에 12.12 쿠데타를 당한 최 대통령은 그 뒤 군의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 사령관의 요구를 무시하지 못했다. (전 보안사령관은 1980년 4월 14일 공석 중이던 중앙정보부장의 자리까지 겸임하면서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전 보안 사령관은 단결된 군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 나가야 된다고 주장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나 집회가 공산주의자의 선전에 말려들어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강력한 군의 힘을 동원하여 막기로 작정하였다. 이러한 군의 요구를 이겨내지 못한 최규하 정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그간의 부분 계엄을 전국 계엄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계엄포고령을 발표 ▲ 모든 정치 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시위의 금지 ▲ 언론·출판·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 각 대학의 휴교령 ▲ 직장 이탈 및 태업·파업 금지 등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정치인의 손발을 묶고 국민의 저항에 쇄기를 박았다. 이어 18일에는 김대중, 김상현, 김종필, 이후락 등 26명의 정치인들을 학원·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합동수사본부에 연행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 시키는 등 정치적 일대 탄압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각 대학과 주요 도시에는 공수 특전단을 비롯한 군 부대가 투입되었다. 12.12에 이은 신군부의 제 2의 쿠데타였다. 체코의 '프라하의 봄'이 소련군의 탱크에 짓밟혔듯이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장갑차에 산산조삭이 나고 말았다.
민족의 십자가, 광주
가로수들의 신록이 여느 해처럼 싱그러운 1980년 5월 18일 아침, 전남대생들은 교내로 들어가려다가 총을 든 군인들에 의해 제지를 당하자 투석으로 맞섰다. 당시 어느 외국 언론이 표현한 대로 ' 20세기의 마지막 비극'인 광주의 학살과 위대한 민중항쟁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신군부는 공수부대의 핵심인 7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를 광주에 파견하고 그중 33대대의 주력이 전남대를 장악했다. 전남대생들은 만일의 휴교 조치에 대비하여 학교 앞에 모이기로 사전 합의한 대로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오다가 계엄군과 대결하게 된 것이다.
학교 앞에서 계엄군에 쫓겨난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시내 거리를 돌며 "전두환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대중을 석방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경찰이 최루탄과 경찰봉으로 해산시키려 하자 다시 투석전으로 맞섰다. 신군부는 경찰력으로 진압이 실패하자 오후 3시경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착검한 M16에 방망이로 무장한 공수대원들은 남녀학생들을 붙잡아 마구 난타했다. 격분한 학생들이 보도 블럭을 깨서 집어 던졌다. 붙잡혀온 학생들을 공수대원들은 군화발로 짓밟았다. 피 흘리는 학생들은 굴비처럼 엮어져 군 트럭에 실려 갔으며, 통금이 밤 9시로 단축되자 귀가하는 학생·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켜 패고 연행하고 만류하는 시민들까지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렸다.
다음날인 19일 시민들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금남로 일대에 많은 시민들이 모여 들었다. 공수대원들은 난폭하게 시민들을 해산 시켜려 들었다.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공수대원들은 분노한 시민들의 합세로 시위가 커지자 몽둥이는 물론 대검까지 사용하였다. 공수대원들의 무자비한 진압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는 사람들의 수가 차츰 많아졌다. 공수대원들의 잔인성을 목격한 군중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총궐기에 나섰다. 20일 날이 밝자 아침부터 금남로에 모여든 시민들이 수 만 명에 달했다. 시민들은 금남로에 주저앉아 공수대원들의 잔인한 진압을 성토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민들의 숫자는 늘어났다. 오후가 되자 공수대원들은 시위하는 시민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광주 시내 곳곳에는 다시 격렬한 공방이 시작되었다.
통한의 계절 - 계엄령을 철폐하라! 전두환에게 죽음을! 남한의 한 도청 소재지 광주에 10만여 시위대는 서울의 계엄 정권에, 또 전두환이라는 새로운 권력자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시위는 곧 전면적 봉기로 확대됐다......
당시의 상황을 TIME은 이렇게 보도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7시쯤 금남로에는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2백여 대가 넘는 차량들이 도청 앞으로 길게 뻗은 금남로를 따라 줄이어 들어왔다. 헤드라이트를 밝힌 차량 행렬의 앞에는 대형 트럭이 앞장을 서고, 그 뒤로 버스와 택시들이 뒤따랐다.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차량 행렬을 에워싸고 금남로를 따라 서서히 도청 앞으로 나아갔다. (금남로 차량시위)
시민들은 박수를 보내고 만세를 부르며 힘을 돋구었다. 시민들과 공수부대 사이에 밀고 밀리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제 시민들은 힘을 얻어 물러서지 않고 공수대원들을 공격하였다. 이날 밤 늦게 광주 시내의 밤하늘을 가르는 굉음이 소용돌이쳤다. 도청을 필사 Ю막?지키던 공수부대는 시민들의 격렬한 공격을 받자 마침내 총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앞장을 섰던 몇몇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크게 다쳤다. 그러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시민들은 인근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 예비군용 총기·실탄·수류탄을 빼앗아 무장하여 계엄군에 맞섰다. 시위대와 공수대원들은 밤을 새우며 혈전을 치렀다. 21일 새벽이 되자 공수부대는 작전상 광주 외곽으로 퇴각하였다. 시민들이 이긴 것이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는가?
(1980년 5월 25일)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는가?
먼저 이 고장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다 목숨을 바친 시민, 학생들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본인이 알기로는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은 과도정부의 중대발표와 또 자제하고 관망하라는 말을 듣고 학생들은 17일부터 학업에, 시민들은 생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 당국에서는 17일 야간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일부 학생과 민주인사, 정치인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구실로 불법 연행했습니다. 이에 우리 시민 모두는 의아해 했습니다. 또한 18일 아침에 각 학교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이에 반발하는 학생들에게 대검을 꽂고 '돌격, 앞으로 '를 감행하였고 이에 우리 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당국의 불법처사를 규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 이럴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엄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를 대량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시민 여러분!
너무나 경악스런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당국은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고장을 지키고자 이 자리에 모이신 민주 시민 여러분!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형제를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배,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여러분!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던 계엄군이 폭돕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국에서는 계속 허위날조, 유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른 방향대로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일부에서는 우리 시민군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민주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을 절대 믿어주시고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광주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22일 오래간만에 시민들은 작은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지난 며칠간 너무나도 엄청난 일들이 벌어져 시민들은 아직 어찌해야 될 지를 몰랐다. 이런 가운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수습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수습위원회는 계엄군과 협상을 하면서 시민들에게 총기를 반납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은 정부가 사과하기 전에 총기를 반납할 수는 없다고 버티었다. 총기를 반납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갈등이 나타났다.
23일부터는 도청 앞 광장에서 매일 성토 대회가 열렸다. 이 성토 대회에서 시민들은 자신들을 폭도로 몰아부치는 정부의 태도에 크게 분노하였다.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던 시민들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살상해놓고 정부는 무슨 염치로 시민들을 '폭도'로 모는가?" , "계엄을 해제하라" ,"정부는 과잉 진압에 대해 사과하라!"는 등 시민들의 요구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25일이 되면서 군은 또 다시 광주 시내로 들어오려는 준비를 서둘렀다. 시민들은 불안에 싸였다. 5월 26일 이미 도청 앞에는 군이 진입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많은 시민들이 모여 궐기 대회를 열며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궐기 대회가 끝난 다음 시민들은 대형 태극기와 1천여 명의 고등 학생 시위대를 앞세우고 가두 행진을 벌였다. 시민들은 "계엄령을 해제하라", "피의 대가를 보상하라", "전두환은 물러나라", "무기 반납을 결사 반대한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오후가 되자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갔다. 계속적인 항쟁을 내 세운 도청 지도부는 시민군을 재편성해 계엄군의 진입이 예상되는 지점에 배치하면서 군의 진입에 대비했다.
오후에는 또 한 차례 궐기 대회가 열렸다. 궐기 대회를 마치고 시민들은 가두 행진에 나섰다. 5천여 명으로 시작된 행진은 광주 시내를 돌며 "광주를 사수하자"고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위기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행렬이 다시 도청으로 돌아왔을 때 남은 사람은 단지 이삼백 명뿐이었다. 그만큼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항쟁 지도부는 마지막까지 시민들에게 다시 한번 돌아갈 것을 권했다. 모두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어린 고등 학생들이 자신들이 나서 도청을 지키겠다고 애원했을 때 모두들 고개를 숙여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다. 200 ∼ 500명의 시민군이 도청을 사수하는 가운데 27일 새벽 3시 드디어 수많은 계엄군들이 광주 시내로 공격해 들어 왔다. 항쟁 지도부는 가두 방송을 통해 광주 시민들과 마지막 작별을 하였다.
"시민 여러분!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결국 도청에 남아 있던 시민들은 계엄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작전 개시 1시간 40여 분만에 모든 저항은 끝이 났다. 새벽녘이 뿌옇게 찾아 왔을 때 도청을 지키려 했던, 그래서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던 젊은 청년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갔다.
'광주 학살'로 불리게 된 이 사건은 그 후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핵심적인 쟁점이 돼 왔다. 그것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감의 진앙(震央)이었다.
신군부의 집권 그리고 그 후....
. 1980. 5월 18∼ 5.27 ; 계엄군, 광주항쟁 무력 진압
계엄사령부는 7.22일 광주사태로 인한 사망자 수가 189명이라고 최종 발표했지만, 아직도 사망자 수, 행불자 수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음
. 1980. 5.31 신군부, 대통령 자문·보좌 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
상임위원장에 전두환 보안사령관 취임
이후 국보위의 강권 통치
* 국보위는 초헌법적 기구로 5.16 군사쿠데타 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성격이 비슷
. 1980. 8.16. 최규하 대통령 사임,
< 사임 성명 >
"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책임 정치의 구현으로 불신 풍조를 없애고 불했했던 헌정사에 평화적인 정권 이양의 선례를 남기며 국민 모두가 심기일전해 화합과 단결을 다짐으로써 시대 요청에 따른 안정과 도의와 번영의 밝고 새로운 사회를.... 민주국가의 평화적인 정권이양에 있어서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국익 우선의 국가적인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 확실히 정치 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8.16)
. 1980. 8.21 전군 지휘관 회의,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
. 1980. 8.27 통일주체국민회의, 보궐 선거를 통해 새 대통령에 전두환 선출 (총투표자 252명중 무효 1표, 100%지지)
. 1980. 9.1 전두환 제 11대 대통령 취임
< 취임 성명 (9.1) >
"... 앞으로 나 자신과 내 주변의 부정과 부패를 스스로 용납치 않을 것이며, 모든 공직자의 부정 부패도 계속 척결해 나감으로써 국민의 불신 소지를 가능한 한 조속히 없애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 개혁 주도세력이 처음에는 대단한 열의와 정의감을 가지고 출발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이 부패하고 사명감을 상실하기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새 시대에는 결단코 이와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 새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며
조병화
...... 온 국민과 더불어 경축하는
이 새 출발 / 국운이여! 영원하여라
청렴결백한 통치자 / 참신과감한 통치자
이념투철한 통치자 / 정의부동한 통치자
인품온화한 통치자 / 애국애족 사랑의 통치자
........
이 새로운 영토 / 오, 통치자여! 그 힘 막강하여라
아, 이 새로운 영토 / 이 출발
신념이여, 부동불굴하여라.... (80년 8월 28일 경향신문)
. 1980. 9.17. 군법회의 김대중에게 내란죄 적용, 사형 판결
* 미국의 김대중 구명운동
전두환, '김대중 카드'를 이용한 '방미' 협상
. 1980. 10.27 제 8차 개헌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 및 7년 단임제 규정)
. 1980. 11.28 민주정의당 창당
. 1981. 1.21 미국, 전두환 초청
. 1981. 1.25 전두환, 계엄령을 해제하고 김대중의 형량을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한다고 발표
. 1981. 1.28 전두환 대통령, 미국 방문
. 1981. 2. 25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간접 선거 실시. 전두환 후보 전체선거인의 90.2% 득표 당선
. 1981. 3. 3 전두환 제12대 대통령 취임. 제 5공화국 출범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시련과 고뇌의 시대를 넘어서서 이제야말로 제 5공화국의 출범으로 자기완성시대를 형성하여야 할 성장과 성숙의 시대에 들어서는 찰나에 있다."(취임사 중)
< 그리고 그 후....>
. 1988. 2월 전두환 대통령, 1988년 2월 외신과의 회견에서
".. 광주 사태는 당시 국가의 존립 기반이 위태로울 정도록 최악의 상황에서 국가 위기를 수습하는 가운데 빚어진 것으로서 대단히 불행하고 유감스러운 일이다."
. 1988 6공 정부,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
청문회 실시
. 1990 광주피해자 보상법 제정
. 1993 김영삼 대통령 특별담화 통해 광주 수습책 제시
12·12를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
. 1995. 7.18 서울지검, 5.18수사 결과 발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요지로 불기소 결정
◁ 국민들의 반발 일어남
1995.11 김영삼 대통령 민자당에 5.18특별법 제정 지시
1995.11.30.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 발족,
검찰 재수사결정
1995.12.2 전두환씨, 연희동자택에서 대국민담화 발표 뒤 낙향
곧 연행, 구속 수감
1995. 12.21. 검찰, 전두환, 노태우씨를 12·12반란혐의로 기소
1996.8 검찰, 전두환·노태우씨에 각각 사형, 징역 22년 6월징역 구형
1997 전두환,노태우씨 상고심 선고
(전두환씨 - 무기징역으로 감형)
1998 김영삼 정부, 국민대화합 차원에서 전두환, 노태우씨 사면
신군부 검열에 삭제당한 시사만화 만평들
시와 노래로 보는 광주 항쟁 그리고 80년대 초반의 사회
① 아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김 준 태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만 흘리는 /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 떠나 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 아침 저녁으로 살아 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해바람이 곤두박질치고 /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 있을 때 /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인간의 깃발이여 /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처럼 뒤집어 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 몸에 상처뿐인 / 죽을뿐인 하나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산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이 세월의 흐름이여
지금 우리들은 다만 / 쓰러지고 쓰러지고 울어야만 하는가
공포와 목숨 어떻게 숨을 / 쉬어야만 하는가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 모두가
넋을 잃고 밥 그릇조차 대하기 /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 구나.....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 죽음과 죽음을 뚫고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나님 아들이여 / 예수는 한번 죽고
한번 부활하여 /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 번 죽고도 / 몇 백 번을 부활할 우리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불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남아 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 지금 우리들은 더욱
푸르른 하늘을 올라 / 해와 달은 입맞추는 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가는 청춘의 도시여
......
.......
.......
........
② 오독
홍 헌 호
어느 시에서 나는
'화염 속의 내 고향 광주'를
'화엄 속의 내 고향 광주'로
잘못 읽었는데
그렇게 읽길 잘했어
화엄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옆에서 죽는 놈 짠하고 불쌍해서
내 목숨 들이붓고 피 뿜는 짓이 있다면
그것이 화엄 아니겄냐?
그것이 불타는 엄숙함 아니것냐?
③ 바위섬 (배창희 작사·작곡 김원중 노래)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곳에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더니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너를 사랑해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아무도 없지만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 광주항쟁을 은유적으로 표현
④ 어머니의 노래 (작사·작곡 김종서)
Part - Ⅰ
Part - Ⅱ < 어머니의 노래 >
Mother! 흐린 두 눈에 내일의 꿈을 꾸나요. 마냥 녹슬어만 가는 당신의 어린 아이들 무장한 캐터필러 광란의 노래 다 포근히 감싸며 안아 주셨죠. Mother! 폭 패인 두뺨에 슬픈 눈물 고이네! Mother! 이젠 알아요. 내일도 해는 뜨는 걸 하지만 날개 돋힌 오만은 차갑게 그 빛을 가리네. Mother! 다 포근히 감싸며 안아 주셨죠.
(랩) 시커멓게 그을린 동심들과 컴퓨터의 포로가 된 내 아이 도시에 엉켜진 거미줄 전파 공해 이 거리를 헤매는 표정없는 얼굴들.
Mother! 다음 세상엔 무엇이 기다리나요.
Part - Ⅲ < 땅 Ⅱ >
타오르는 연기 뒤로 전사들의 메아리. 내 형제를 지키는 자랑스런 T.N.T 이글대는 태양 아래 춤을 추는 자동차 구멍뚫린 하늘 아래 내리쬐는 검은 빛 다시 한번 들려줘 어머니의 노래를 희미하게 식어가는 어머니의 노래를
Part - Ⅳ < 안녕히 >
이제는 모두 지워버리고 이젠 잠을 잘 시간. 때로는 힘겨운 나날들 한숨 뒤로 묻어요. 그대 품에 가득 안기어 어제의 수고에 감사드려요. 새들도 모두 집을 찾는데 우리 이젠 안녕히 슬픔도 이젠 안녕히
⑤ 오월의 햇살 (이선희 노래)
어디선가 날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면 / 보이는건 쓸쓸한 거리 불어오는 바람뿐인데 / 바람결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쓸어올리면 / 가던 걸음 멈추어서서 또 뒤를 돌아보네 / 어두운 밤 함께하던 젊은 소리가 허공에 흩어져가고 아침이 올 때까지 노래하자던 내 친구 어디로 갔나 / 머물다 간 순간들 남겨진 너의 그 목소리 / 오월의 햇살 가득 건너 우리 마음 따스하리
⑥ 불씨 (한돌 작사·작곡 신형원 노래 1982)
그 누가 나를 / 사랑한다고 해도
이젠 사랑의 불꽃 / 태울 수 없네
슬픈 내 사랑 / 바람에 흩날리더니
뜨거운 눈물 속으로 / 사라져버렸네
텅빈 내 가슴에 / 재만 남았네
불씨야 불씨야 / 다시 피어라.
* 이 노래는 5공 초기 젊은이들의 좌절감과 패배감을 노래하고 있다. '불씨'는 야망과 정열과 투쟁과 항쟁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불꽃은 타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자기변명, 자기 정당화에 불과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두고 보자는 최소한의 자존심, 바로 불씨는 살아있다는 사실을 끝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불꽃은 꺼져버렸지만 또 타오를 수 있는 불씨만큼은 가슴 속에 살아있기에 '절대적인 힘'에 부딪쳐 물러나도 권토중래를 기약한다는 자기 위안의 의미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에 대학가에서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⑦ 여러분 (윤항기 작사·작곡 윤복희 노래)
윤복희의 히트곡 은 '단 한분'의 심기를 건드려 불경죄로 쓴맛을 본 대표적 노래다. 이 노래는 원래 가수 남진과의 이혼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던 윤복희를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오빠였던 윤항기가 1979년 만든 노래였다. 1주일간 문을 닫고 버티던 윤복희는 결국 이 노래로 문을 열고 힘없이 악보를 따라 부르던 그녀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 내가 위로해줄께
네가 만약 서러울때면 / 내가 눈물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 내가 너의 벗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 /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이들 남매는 이 단 한사람이 아닌, 세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이듬해 서울 국제 가요제에 출품했다. 오빠는 지휘봉을 잡고 동생은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대상을 거머쥐었다. 어쨌거나 은 여러사람이 좋아했던 곡이였다. 전두환 대통령도 그 '여러분'중의 한명이었다. 의 인기 덕분에 조영남과 함께 청와대 영빈관에 초대되었다. 대통령을 비롯해 내외 귀빈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자리였다. 그 지엄한 자리가 의 생명이 끝날 자리일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무대에 나서기 전 노래 연습을 할 때였다. 청와대측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정중하게 가사를 바꿔 달라는 거였다. 노랫말 중에 '네가' 혹은 '너는'하는 부분이 반말투여서 대통령 앞에서 부르는 것은 좀 심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복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네가' 대신 '그대' '당신'등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노래의 가사를 바꾸는 것은 곡을 바꾸는거나 마찬가지라며 요구를 물리쳤다. 영빈관 객석과 무대와의 사이는 5m정도 됐다. 먼저 무대에 오른 윤복희는 내외빈이 가득한 무대를 향해 을 불렀다. 열창이었다. 그러나 그 '네가'가 결국 말썽이었다. 문제는 반말만이 아니었다. 대통령 내외를 향해 아예 손가락까지 까딱대니 대통령은 물론 주위 분위기까지 어색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불경'도 이만저만한 '불경'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 이후로 그녀에게 청와대 초청은 더 이상 없었다. 그리고 노래의 방송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의 인기는 시들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할머니께서 광주에 계시기 때문에 설날만 되면 광주에 내려가곤 합니다. 작년 이맘때 SBS가 지방에서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래시계]를 서울에서 본 후 다시 광주 유선 방송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저도 나름대로 감동을 받으며 보았지만, 직접 광주 항쟁을 겪으신 할머니와 막내 삼촌 등 광주에 계신 친척들이 모래시계를 보며 느끼는 것들은 분명 저와 달랐습니다. 친한 친구가 총에 맞아 죽고, 옥상에서 저격수가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며 고추장을 푸러 가셨다는 할머니..... 막내 삼촌은 몇 일 동안 어두컴컴한 다락방에 숨어 할머니께서 갖다 주시는 밥으로 생활하셨다고 합니다. 아주 먼일로 여겨졌던 일들을 직접 들으면서 한 사람의 야망이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역사는 계속 반복됩니다. 사람의 욕망으로 실수를 또 반복합니다. 또 언젠가 비극은 시작되겠지요. 그것은 필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반성을 합니다. 과거의 일들을 돌이켜보며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자고 다짐을 합니다. 사람의 욕망으로 비극은 언제나 역사 속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다시 배우며 욕망을 억제하고, 모두 다 같이 행복할 수 있게 노력하려는 태도가 바로 역사를 배우는 태도가 아닐까요?
(명덕외고 96년 졸업생 불어과 김민선 )
망월동
언니 오빠들이 봄비를 맞으며 / 노래를 부릅니다.
무덤 속의 오빠들에게 / 들려 주는 노래입니다.
안경 쓴 할머니가 / 비를 맞으며
엉엉 웁니다.
무덤 속의 언니가 / 보고 싶은가 봅니다.
노래 소리를 듣고 / 무덤 속에서
제비 꽃이 피어납니다.
엉엉 우는 소리를 듣고 / 풀잎들이
할머니 머리를 만져 줍니다.
5.18 묘역에서는 / 비가 와도
깃발이 펄럭입니다.
김진경 (광주 서석국교 4학년)
아기 천사에게
태어났으면 나와 동갑인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아기 천사야! 너의 아빠가 엄마의 묘비에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라고 적은 걸 보고 나는 너를 아기 천사라고 부른다.
만삭의 어머니들처럼 불룩불룩한 무덤들이 너무 많아서 달님도 조용히 살펴간다는 망월동. 소풍 가방에 챙겨 온 치즈, 햄버거와 콜라를 먹으려다가 너의 영전에 바친다. 너도 이런 걸 좋아했을 거야.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최루탄 터지지 않은 오월이야. 5월은 언제나 그렇게 맵고 눈물 흘리며 숨어 있어야 하는 계절로만 알았지 뭐야. 쓰러진 엄마 뱃속에서 펄쩍 펄쩍 뛰었다는 말을 듣고 너라도 살려내지 못한 그 순간이 무척 안타까웠단다. 엄마가 쓰러지면 아기도 쓰러지는 것처럼 망월동이 쓰러지면 나도 쓰러지겠지? 엄마가 묻히면 아기도 따라 묻히는 것처럼 5월이 묻히면 희망도 따라 묻혀 버리겠지?
네가 태어나려다 만 세상은 너를 죽인 사람들에겐 천국 같은 곳이지만 너의 아빠와 같은 분들에겐 눈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란다. 민주화란 말은 참 슬퍼. 무덤 위에서 피어난 민들레 꽃처럼 봄비 속에서 노오랗게 떨고 있는 생명 같은 거야. 초록 풀잎들이 싱싱하게 자라는 걸 보면 무덤 속의 거름으로 태어나는 누군가가 있다는 거야. ..... 우리의 초록빛 소원을 기름지게 키우는 아기 천사야. 햄버거 봉지를 든 내 손이 부끄러워 목이 메인다. 쑥쑥 자라난 풀밭을 헤치고 불쑥 뛰어오르는 개구리 왕자처럼 깜짝 놀라게 찾아올 그날을 위하여 우리의 몸을 맑은 샘물로 채워 두어야겠어.
안녕! 나의 친구 아기 천사야.
박건호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지금은 약 4시가 넘은 새벽입니다. 이것 저것 하다보니 잘 시간을 놓쳐 뜬 눈으로 밤을 새게 되었어요. 제가 원래 좀 밤잠이 없어서요. 이 늦은 시간에 펜을 든 건 아까 보충시간때 배운 '5.18 광주사태'에 대해 몇자 적어보려구요.
제가 5.18에 대해 알게 된 건 초등학교 6학년때였어요.
그해 초에 전 광주로 전학을 갔고 또 그 무렵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을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김대통령이 5.18을 크게 떠들썩하게 만드는 것을 보며 많은 광주인들은 비난을 하였습니다. 저의 담임선생님께서도 5.18사태를 정치에 이용해먹으려는 수작이라면서 도덕시간마다 목에 핏대를 세우시며 말씀하셨던게 기억이 납니다. 근데 그때 당시엔 저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몰랐어요. 전 제가 광주에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 살면서... 정말 많은 걸 경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우리나라 정치에 대한 그들의 관심들... 어린 나이였지만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나 그들은 5.18을 잊지 못하고 있었고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저의 세대들에게도 그 정신을 가르치고 그들의 아픔을 잊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들이 5.18때 희생된 많은 사람들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속 계승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제가 느끼기엔 그들은 뭔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아주 단편적이고 작은 경험들이었지만 제가 본 광주인들은 너무나 배타적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역사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이란 사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조건적인 적개심이 전 너무 무서웠고 한편으로는 불쾌했습니다. 물론 군부가 저지른 용서받지 못할 과오는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들의 증오는 거기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호남지방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국민들 또 그 중 영남 지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호남인이 아니면 누구든 적으로 보는 닫힌 그들의 사고방식은 분명 고쳐져야 합니다.
그 당시 우리 국민은 모두가 희생자였고 그 상처를 치유하려면 국민 모두는 서로 화합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그들이 이렇게 하기란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치른 희생과 억울함에 대한 상처 역시 정치인들의 보상과 사죄 또한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피해 의식도 버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너무 냉정하다고 누가 그러긴 하지만... 저의 이 말도 안되는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몽사몽간에 쓴 거라 저도 정신이 없네요. 그리고 진짜 현대사를 고 3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배우게 됐는데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인 수업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 ○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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